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로마인 이야기/비판 (문단 편집) === 8권 === * [[가이우스 리키니우스 무키아누스]]가 집정관 자리도 요구하지 않고 깔끔하게 물러났다고 시오노 나나미는 설명한다. 그가 다른 정치인과 다르게 은퇴한 후 집필에 몰두한 건 사실이나 73년도 집정관을 역임한 뒤 은퇴하였다. 다만 황제 자리를 깔끔하게 포기하고 베스파시아누스를 밀어준 것은 사실이며, 내전을 보고 황제 부적격자들의 즉위가 얼마나 골 때리는 결과를 초래하는지 알고 적극적으로 막으려 노력한 소신은 분명 있었다. * 베스파시아누스가 네로~오토의 근위대와 비텔리우스의 근위대를 조금씩 각 군단에 배치했다고 하는데 그렇지 않다. 실제로는 더 관대하게 처리했다. 한번에 처리하지 않고 온건하게 근위대에서 내보낸 건 맞는데, 새 황제에게 충성하는 조건으로 잔류하는 게 가능하였고 그렇지 않더라도 무키아누스가 보낸 도미티아누스의 조건(명예로운 전역과 토지 수여)을 수락하고 조금씩 퇴직했다.[* 3년 혹은 15년 근무 후 퇴직한 경우도 나타나는 걸 보면 대부분은 베스파시아누스 황제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잔류했을 것이다.] 3배의 연봉을 받는 근위대원들을 1/3 연봉을 받고 혹독한 전방에 보낸다는 건 비텔리우스가 잘하던 그 정치적 보복과 다를 게 하나도 없는, 말만 지방 발령이지 사실상 정치 보복성 해고 통보이기 때문이다. * 비텔리우스 형제와 아들을 빼고 관용을 베풀었다고 하는데 그렇지 않다. 물론 마구잡이로 정치 보복을 해서 수만명씩 처형한 것은 아니지만, 네로 시대의 음모와 갈바의 양아들이 된 걸로 유명한 명문 피소 가문의 남성들이 대거 처형되는 등 보복 자체는 있었다.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시대에 여러 음모에 휘말리고 내전으로 인해 공화정 시대부터 내려온 명문 귀족들이 많이 죽었는데 살아남은 이들 중 또 많은 이들이 플라비우스 왕조의 황제들에게 대거 숙청되었다. 본국 지방의 [[기사계급]] 출신이라는 것에 대해 상당한 부담감을 가지고 있었고 이 것이 그 숙청을 하게 된 큰 원인이라고 보고 있다. * 베스파시아누스 황제가 국가 재정을 재건하는 데 세율을 올리지 않았고 무슨 건전한 상식으로 극복했다고 하는데 그렇지 않다. 베스파시아누스 황제는 네로가 빵구 낸 재정 피해를 400억 세스테르티우스로 설정해, 재정이 나아질 때까지 속주세를 최대 2배나 인상하였고 면세 혜택이 있는 도시에 세금을 부과하였다. 다만 네로의 방만한 재정 운영과 내전기 군비 소모, 그리고 속주 반란 진압비를 전부 계산해 보면 세금 인상을 안 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400억 세스테르티우스까지 측정한 것은 뻥튀기했다고 해도 이는 불가피한 처사였다 봐야 한다. * 비텔리우스 황제가 근위대를 9개에서 16개 대대로 늘렸다고 서술해 놓았다. 16개 대대로 늘린 건 맞지만 네로 황제 시기에 이미 9개 대대에서 12개 대대로 늘어난 상태였기에 12개 대대에서 16개 대대로 4개 대대가 더 추가된 것이다. * 베스파시아누스가 소변세를 매긴 대상을 공중변소 이용자가 아니라 소변을 수거해 사용하는 양털 표백업자들이라고 서술했는데, 대부분의 연구자들은 공중변소 이용자들에게도 이용요금 형태로 소변세를 매겼다고 보고 있다. * 베스파시아누스가 정실 부인을 사별한 후 사실혼 관계에 있었던 해방노예 여성 [[https://en.wikipedia.org/wiki/Caenis|카이니스]]는 본래 [[소 안토니아]]가 신임하던 해방노예 비서관으로 베스파시아누스를 소 안토니아의 아들인 [[클라우디우스(황제)|클라우디우스]]에게 천거하는 등 정치적으로 베스파시아누스를 많이 도운 은인이자, 정치적 동맹자이기도 했다. 하지만 베스파시아누스가 제위에 앉은 후로 사실상 황후처럼 대접받았다는 기록이 분명히 있는데도 시오노는 그냥 해방노예 출신 여자를 정부로 삼았다 정도로 서술하여 카이니스의 역할을 무시하고, 베스파시아누스가 마치 아내와 사별 후 해방노예를 정부로만 부린 듯 서술하고 있다. * 도미티아누스가 조카딸 율리아와 근친상간을 저지른 것을 황후 도미티아가 알게 되어 암살을 묵인했다는 학설을 따라 서술했다. 하지만 도미티아가 이후 재혼하지 않고 남은 평생을 '나는 도미티아누스의 아내'라고 말하며 수절하는 등 부부 사이가 좋았다는 증거도 많다. 때문에 도미티아 묵인설에 반대하는 학자들도 많은데 이 부분은 서술하지 않고 마치 도미티아가 남편에게 한을 품었다는 식으로만 서술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